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소련 국경분쟁 (문단 편집) ==== 신장성 충돌과 핵전쟁의 위기 ==== 중국이 낙관하는 사이, 국경에선 계속 충돌이 벌어졌다. 4월부터 6월에 이르는 기간, 극동과 신장에서 계속 충돌이 벌어졌다. 5월 경, 우즈베키스탄의 덜라티 마을을 두고 중국과 소련 양측의 무력충돌이 또 발생했다. 이 때 중국군은 무단으로 국경을 수정하려 시도했고 양측의 병력이 대치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1969년 7월 8일, 흑룡강성 고르진스키 섬에서도 충돌이 벌어졌다. 가장 규모가 컸던 사건은 1969년 8월 13일, 신강성 유민현 사건이었다. 중국군은 이전부터 카자흐스탄 국경지대의 잘란스콜 호수를 자주 침범했고 소련군은 참호를 구축하고 BTR 장갑차 두 대를 전진배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긴장이 고조될 때 중국군이 기관총을 발사했고 소련군은 곧바로 맞보복을 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곧이어 소대 규모의 중국군 수십명이 대전차화기로 무장한 상태에서 공세를 취했고 언덕 하나를 점령했다. 그러자 소련군 차량화소총부대가 반격을 가했고 언덕은 탈환되었다. 중국군은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채 패퇴해야 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한 반면 중국군은 2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생포되고 40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또한 중국군의 [[TT 권총]] 4정, [[SKS]] 소총 9정, [[데그탸료프 경기관총|RPD]] 기관총 4정, 대전차 수류탄 4기, 수류탄 27개, 영화 카메라 2개, 카메라 1기 등이 노획되었다.[* 아마도 '''전투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상황을 낙관하면서''' 전투 후 선전영화 촬영용으로 챙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건 이후 소련은 '''[[핵공격]]'''을 언급하는 강경한 노선을 취했다. 프라우다는 중국이 위험한 나라로 변했다고 비난했으며 소련군 기관지 <붉은 별>은 '현대의 모험가'들에게 압도적인 핵공격을 안겨주겠다고 선언했고 소련이 중국을 핵으로 공격하기 위해 동유럽의 지지를 호소한다는 소문도 흘러나왔다. 워싱턴의 소련 대사관은 백악관에 소련이 중국 핵시설을 공격할 경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해 비밀리에 타진했고 미국 정부는 대답을 회피했다. 가을 들어서는 소련이 신장의 중국군 핵무기 실험장에 핵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외신과 소식통을 등해 들려오는 핵전쟁의 위험에 마오쩌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중국은 [[핵무기]]와 [[미사일]]은 보유하고 있었으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없고, 사정거리 2,000km 정도의 DF-2 [[MRBM|준중거리 탄도 미사일]] 정도만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모스크바]]를 타격하기에는 무리였다. 반면, 소련군은 극동에 R-12/R-14 중거리 탄도 미사일들을 충분히 배치하고 있었고 중-소 간 핵전쟁이 벌어진다면 소련은 동부의 도시 일부를 내주는 대가로 중국을 절멸시키는 것이 가능했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군의 기계화 빈도는 1966년, 마오쩌둥이 군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https://baike.baidu.com/item/%E7%BD%97%E7%91%9E%E5%8D%BF|뤄루이칭]], [[양상쿤]] 등을 [[펑더화이]] 파벌로 몰아 숙청해버린 탓에 건국 이후 거의 진행되지 않아 [[공군]]이나 기갑부대는 1950년대 수준에 머물고 있었으며[* [[59식 전차]]는 그 수가 적었고 [[T-34-76|T-34]], [[ISU-122]] 등의 구형 장비들이 주력이었다.] 공군의 경우 야간 전투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도 문화대혁명의 직격타로 수많은 고급 장교들이 박해를 받아 인민해방군은 정규전을 치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소련에 망명해 있던 [[왕밍]]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들에게 중국에 대한 무력개입을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중국의 현재 정세는 사회주의 진영과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1956년 헝가리 사건보다 더 위험하다.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 우리는 그들에게 정치적 지원은 물론이고 무력을 통한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고, 가능하다면 중앙아시아와 몽골인민공화국의 민족들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해야만 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소련군이 극동과 신장은 물론,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한 몽골 국경에까지 군대를 배치하자 8월 27일, 마오쩌둥의 제의로 저우언라이가 전국인민방공지도기구를 설립, 전국적으로 방공공사를 세우게 했다. 8월 28일,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는 몽골과 소련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모든 성에 군사 동원령을 하달하고 전국에 적색경보를 발령하여 군민, 군정 단합을 강화하고 파벌의식을 타파하며 반침략전쟁을 빈틈없이 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각 성, 직할시, 자치구에서 선전대회가 열렸으며 저우언라이의 지도 아래에 대대적인 베이징 소개 작업이 이루어졌다. 마오쩌둥은 건국 20주년 기념식에 쓰일 원고에 "전 세계 인민들은 단합하여 모든 제국주의, 사회제국주의가 발동하는 침략전쟁을 반대하며 특히 원자탄을 무기로 한 침략전쟁을 반대하자!"라는 문구를 추가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유럽에 신경 쓰기도 바빴던 브레즈네프는 중국 역시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역시 만약 소련이 중국에 핵공격을 가할 경우 미국이 우호적인 중립을 취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사를 전달해왔다. 닉슨과 키신저는 소련이 중국에 핵공격을 가할 경우 '''130개의 소련 도시에 핵공격을 가할 계획을 수립했고''' '행동'에 옮긴다면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주미 소련 대사관에 경고했다.[[https://www.google.co.kr/amp/s/amp.scmp.com/article/714064/nixon-intervention-saved-china-soviet-nuclear-attack|#]] 그렇지만 마오쩌둥 지도부를 매우 혐오하고 불신했던 브레즈네프는 마오쩌둥과 만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시긴 수상에게 중국과 협상할 것을 지시했다. 7월 26일, 소련 외무부는 중국 국무원에 서신을 보내 중소고위급 회담을 열어 긴장관계를 완화시키자고 제안했으나 8월 13일의 신장성 유민현 공격이 있자 중국은 격노하여 어떠한 형태의 대화도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는 한편 소련에 대한 외교 공세에 나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